스가랴 4장 6~7절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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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 4:6–7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
“힘으로,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1. 배경설명
북이스라엘이 BC 722년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고, 남유다가 BC 586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패망하여 나라를 잃게 되고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에게 약속하신데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바벨론이 바사 즉 페르시아에게 멸망당하고 두 번째 제왕인 고레스가 칙령을 내려 유대인들을 고국으로 돌아가 예루살렘 성전을 제건하도록 명령합니다.
에스라 1:1–3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이에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예수아가 중심이 되어 약 5만여 명의 동족을 인솔하여 예루살렘으 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을 제건 하려합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당시에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유대인들로 인해 성전 건축이 중단됩니다.
에스라 4:4–6 “이로부터 그 땅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되 바사 왕 고레스의 시대부터 바사 왕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 계획을 막았으며 또 아하수에로가 즉위할 때에 그들이 글을 올려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을 고발하니라”
이 배경에는 앗수르의 포로정책과 바벨론의 포로정책의 차이로 인한 인종의 문제가 결부되어 있습니다. 앗수르는 정복한 나라의 민족성을 말살하기 위해 혼혈정책을 폅니다. 즉 북이스라엘을 정복한 후에 북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에 다른 이방민족을 이민시키고, 이스라엘 백 성은 포로로 사로잡아 다른 지방으로 보냅니다. 그리고 서로 다른 이방민족끼리 결혼하고 종 교도 혼합하게 합니다. 그러니 앗수르의 지배하에 있던 사마라이인들은 모두가 이방인과 피가 섞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런 사마리아인들을 같은 민족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같은 민족끼리 결혼하여 혈통을 유지하는 것을 생명처럼 여겼던 유대민족으로써는 이런 사마라아인들을 받아 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어렵게 시작된 성전건축이 시작한지 2년도 안 돼 중단됩니다. 그리고 십 수 년 이 흘렀습니다.
처음 사명감으로 성전 건축을 모든 것을 버리고 왔던 유대인들은 인제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 는 것은 더 귀하게 여깁니다.
여전히 성전 건축을 방해하려는 사마라아인들의 방해는 계속됩니다.
더 이상 성전을 건축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학개 1:2–5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 그러므로 이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니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주신 말씀이 본문입니다.
스가랴 4:6–7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
2.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앞에서 살핀 것처럼 수룹바벨이 처한 상황은 말 그대로 절망입니다. 앞을 봐도 뒤를 봐도 도 저히 답이 없습니다. 여전히 사마리아인들의 방해는 계속되고, 안으로 유대인들의 마음은 이미 성전건축에서 떠나있고, 실권을 쥐고 있는 바사의 왕들은 법으로 성전건축을 막고 있고..... 도저히 방법이 없습니다. 성경 말씀처럼 ‘힘으로도 능력으로도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우리는 이런 일들을 당할 때, “한계상황”이라고 합니다.
이런 한계상황이 닥치면 사람은 크게 두 가지 반응을 나타냅니다.
그 첫 번째는 바로 ‘포기’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선택합니다. 이 선택은 너무도 당연한 결과 같습니다. 현명한 판단 이라고 자위합니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충분합니다. 어느 누구도 이런 상황이라면 똑같은 결정을 했을 것이라고 위로합니다.
그러나 다른 길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의 길입니다.
바로 힘으로도 능력으로도 되지 않을 때,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 ‘성령님’을 바라보고 의 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1) 나의 힘으로 나의 능력으로 되지 않는 인생
스룹바벨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한 ‘한계상황’이 그들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이런 한계상황을 누구나 맞닥뜨리게 됩니다.
지난 3년간 코로나 펜데믹을 지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한계상황으로 내몰려왔습니다. 그리고 그런 어려운 상황은 현재진행형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포기’하기보다는 믿음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 우리의 연약함과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라!!!
믿음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가 먼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연약함과 한계 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한 없이 연약합니다. 우리의 능력에는 한계가 반드시 있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시편 39:4–5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야고보 역시 이렇게 고백합니다.
야고보서 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인간의 어리석음은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엄청난 착각입니다.
가끔 ‘하나님을 믿느니 내 주먹을 믿어라!!’고 큰 소리 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것입 니다. 우리의 주먹은 감기만 걸려도 힘이 없습니다. 우리는 한 없이 연약하고 무능한 존재입 니다. 그래서 반드시 우리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한계상황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나의 연약함과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그래야 ‘진정으로 강하고 능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를 힘입으라!!!
앞에서 믿음의 사람 다윗은 ‘자신의 연약함을 알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그렇 게 자신의 약함과 인간의 한계를 인정한 다윗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만을 힘 입어 살았습니다.’
시편 56:10–11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리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다윗은 자신에게 닥치는 수많은 위기와 위협 속에서 ‘자신의 능력이 아닌 오직 하나님 한분 만을 의지했습니다. 그리고 그 두려운 상황들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손에서 벗어나 위기를 극복하고 지은 시인 시편 18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시편 18:1–2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다윗만이 아닙니다.
우리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힘입어 사는 자들입니다.
사도행전 17: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우리가 가끔 착각 하는 것은 나의 힘으로 산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을 힘입어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다윗이 노래한 것처럼...야고보의 고백처럼 우리가 이 시간 기도해야 할 것은...하나님 저는 연약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그 힘을 입습니다. 저와 함께 하여 주옵소서. 그 힘으로 기동하며 살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2일차/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3.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스룹바벨에게 하신 주님의 명령도 그것입니다.
스가랴 4:6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하나님은 지금 스룹바벨과 이스라엘이 처한 상황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들의 힘이나 능력 으로는 도저히 그들의 한계상황을 넘어설 수 없음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일을 당신이 이루시겠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앞에서 연약함을 인정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할 수 있게 된다고 했는데, 실제 로 그렇게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할 때, 역사는 일어납니다. 안 되는 일이 됩니다.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 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 즉 ‘성령 으로만 되는 것입니다.’
❖ 성령은 권능입니다.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제자들이 권능을 받게 되어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는 약속입니다.
실제로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 제자들이 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속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실 때, 제자 베드로는 연약함으로 인해 자신을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자라는 계집종의 말에 두려워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 성 령 강림 이후에 그가 ‘공회 앞에 섰을 때’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전하지 말라는 ‘공회원들의 협박에도 굴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4:18–20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베드로의 변화에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오직 오순절 성령 강림 외에 다른 이유는 없습니 다.’ 이것이 성령의 능력입니다. 권능입니다. 성령 안에서의 변화이며 당당함입니다.
베드로와 요한 뿐만이 아닙니다. 사도들이 공회에서 놓이자 자신들의 당한 일과 공회에서 들 은 이야기를 다 교회 공동체에서 전합니다. 그러자 교회는 한 목소리로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기도가 끝나고 그들은 동일하게 성령 충만함 가운데 죽음을 각오하고 담대히 복음을 전합 니다.
사도행전 4: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 성도들의 담대함과 당당함은 오직 성령 충만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영’, ‘성령’ 안에 ‘권능이 있습니다.’ 오늘도 성령 충만한 사람은 세상 어떤 박해 가운데서도 ‘담대할 수 있습니다.’ ‘당당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3: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 바울이 성령 안에서 에베소교회를 향한 간구입니다.
바울의 간구에서 주목할 말씀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에베소교회 성도들의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동일하게 우리의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빌립보서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 성경 구절 가운데 자주 잘못 인용되는 말씀 가운데 대표적인 구절입니다. 이 구절을 읽으 면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자기최면을 건다면 대단히 크게 오해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강조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입니다.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내게 능력 주시는 성령 안에서 우리는 주님이 원하시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아닙니다. 성령 이십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닙니 다. 주님의 계획과 섭리입니다.
❖ “됨”은 ‘성령님의 영역’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모든 이론을 이루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이것이 신앙의 묘미입니다.
요한복음 16: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 주님이 친히 말씀하십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제자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말입니다.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갈라디아서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 우리가 주님이 원하시는데로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고, 영으로 승리하는 길은 오직 ‘성 령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